작년 4분기 가계 평균 흑자율 25.2%… 금융위기 이후 최고
자산 감소·물가 상승에 1분기 소비 위축 뚜렷
내수 기대했던 정부 비상… 기대인플레 낮추는 게 관건

경기도 분당에 사는 주부 홍명선(42)씨는 지난해 말부터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가는 횟수를 크게 줄였다. 예전에는 특별히 살 물건이 없어도 습관처럼 들르곤 했는데, 요즘엔 의식적으로 안 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면 뭐라도 하나 사게 된다는 게 이유다. 그 결과 새해 들어 홍씨의 가계부는 물가 상승에도 불구, 오히려 나아졌다. 남은 돈으론 저축을 늘려 빚 갚는 데 쓸 예정이다.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의 10% 수준을 밑돌아 부담이 크지 않지만,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급적 지갑을 닫고 있다는 게 홍씨의 설명이다.

절약은 좋은 것이지만…

절약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가계가 지갑을 닫는다면 기업이 물건을 만들어도 사줄 사람이 없어 경제가 돌아가지 않게 된다. 이른바 '절약의 역설〈키워드〉'이다. 한국 경제도 위 사례의 홍씨와 같은 사람이 늘면서 절약의 역설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4분기 가계 평균 흑자율은 25.2%를 기록했다. 가계가 쓰고 남은 돈이 가처분소득(세금 등을 빼고 순수하게 소비에 쓸 수 있는 소득)의 25.2%를 기록했다는 뜻이다. 흑자율은 21~23% 선을 꾸준히 유지해 오다 지난해 4분기 들어 25%대로 치솟았다. 금융위기가 경제를 강타했던 2008년 4분기(25.4%) 이후 가장 높고, 관련 통계가 나온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흑자율이 올라가면 가계의 재정 상태는 개선될 수 있다. LG경제연구원이 자체적으로 가계 재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만든 가계부실지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22를 전후해 등락하다 지난해 3분기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 1.76까지 치솟았으나, 4분기엔 0.77로 크게 개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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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계 건전성이 개선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급격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면서 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LG경제연구원 김건우 연구원은 "빚이 많은 가계는 빚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지속하되 여유가 있는 가계들은 적극 소비에 나서야 하는데, 여유가 있는 가계까지 긴축에 나서면 경제 활력이 크게 저하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계 가처분소득 가운데 소비지출 비중은 74~75%대를 꾸준히 유지해 오다가, 지난해 4분기 들어 72.7%로 급락했다. 물가 상승 효과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소비가 얼마나 늘었는지 알려주는 실질 소비지출 증가율은 2009년 2분기 이후 10분기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항목별로 보면 가정용품(-8.2%), 오락문화(-3.6%) 등 당장 줄일 수 있는 분야에서 감소폭이 컸다.

올 1분기 들어선 소비 위축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화점 1월 매출은 설 연휴가 있었는데도 1년 전보다 4.1% 줄었고, 대형마트 2월 매출은 지난해보다 영업일이 늘었는데도 1.7% 감소했다. 자동차 판매량은 올 2월엔 전년 동월대비 소폭 증가했으나, 지난해 10월 이후 4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앞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이은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올 1분기 들어 금융위기 이후 소비 심리가 가장 크게 위축돼 있다"며 "소비자들의 부정적인 전망이 지속되고 있어 당분간 위축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당초 올해 수출에 비해 내수가 좋을 것으로 예상해 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폭의 소비 위축이 발생하고 있어 정부의 경제 운용에 비상이 걸려 있다. 올해 예산의 60%를 상반기에 집행하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아직 효과를 못 내고 있다.


◇고물가도 소비 부진의 원인

소비 부진이 모두 절약의 역설 때문일 수는 없지만, 정부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김정관 기획재정부 경제분석과장은 "가계 흑자율 개선이 절약의 역설 때문인지 소득 증가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절약의 역설로 소비심리가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모든 지표를 보수적으로 읽으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대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절약의 역설 이외에 소비 부진을 불러오는 주된 요인으로는 고(高)물가가 꼽힌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소비자들 사이에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란 '기대 인플레이션'이 너무 높아 긴축 심리가 강화되고 있다"며 "기대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현재의 고물가가 국제 유가 등 공급 측면에 원인이 있어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수요 억제를 통한 물가 관리는 경기 부진을 심화시킬 수 있어 더욱 쓰기 힘든 카드다. 결국 지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급 주체인 기업에 가격 인상 자제를 압박하는 것뿐이다. 

☞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것이 개인 차원에선 미덕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저축을 늘리면 사회 전체의 수요가 감소해 기업의 생산 활동이 위축되고 결국 국민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소비가 미덕이고 절약은 악덕이 되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처음 주장했다.


Posted by FatalF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