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룰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라는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의 룰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돈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배워야 한다.

1. 돈 모으는 법 , 2. 돈 굴리는 법 , 그리고 3. 돈 쓰는 법

순서대로 배워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비극은 돈을 거꾸로 배우면서 찾아온다.

돈을 모으는 것은 끈기요.

돈을 굴리는 것은 기술이요.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다.

끈기와 기술을 갖추면 안정된 삶이라는 과실을 얻을 수 있고, 여기에 예술을 더하면 인생은 감동이 된다.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로맨틱하지도 참신하지도 않다.

가난이란 그저 '곧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상태' 일 뿐이다.

가난은 철저히 상대적이고, 감정적이며 폭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단어다. 

돈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그릇이 있다.


노동은 숭고하다.

그러나 그것에 인생을 걸면 곤란해진다.

노동의 숭고함은 노동을 상실한 노년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노동은 너에게 연명할 시간을 준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을 주진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을 이해하면 자본가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너를 먹여 살린다.

그러나 배불리 먹이진 않는다.

배가 부른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것을 얼마나 빨리 깨닫는지가 네 인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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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 "쓴소리" /  신사람 2018.04.13 

m.blog.naver.com/danmass/221252407739#

 

안녕하세요.

날씨가 선선하고 참 좋은데요,

가까운 친지와 저녁을 겸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씀씀이가 지나친 자녀에게 쓴소리를 부탁받은 자리였는데요.

쓴소리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특히 더 그렇고요.

오늘은 얼큰하게 취해 담아 두었던 상념들을 털어놓았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은 제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더군요.

화법이 다소 거칩니다.

이해를 부탁합니다.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룰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라는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의 룰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돈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배워야 한다.

돈 모으는 법

돈 굴리는 법

그리고 돈 쓰는 법

순서대로 배워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비극은 돈을 거꾸로 배우면서 찾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돈은 순서대로 배워야 '밥값' 하며 살 수 있다.

돈을 모으는 것은 끈기요.

돈을 굴리는 것은 기술이요.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다.

끈기와 기술을 갖추면 안정된 삶이라는 과실을 얻을 수 있고,

여기에 예술을 더하면 인생은 감동이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예외 없이 그 공식대로 움직인다.

그저 그 공식을 대중이 모를 뿐.

돈 쓰는 것부터 배운다는 건 무엇과 같은가.

배고픈데 예술 하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 또한 다양한 삶의 한 방식으로 존중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고 자위하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네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자본주의의 초침은 냉정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나이 마흔에 굳는다.

육신은 팔십까지 살지언정 영혼은 이미 관뚜껑을 닫는다는 의미이다.

나이 마흔이란 그런 것이다.

네가 자본가로 살려거든 나이 마흔에는 스스로 깨침을 얻어야 한다.

나이 마흔에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인생을 베팅하는 시기가 필히 등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크게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저 아무도 주변에서 이야기해 주지 않을 뿐.

나이 마흔이란, 저승사자가 영혼의 관뚜껑을 닫는 나이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이 마흔의 의미.

네가 살면서 배워 온 인생의 법칙들.

조직에 똬리를 틀어 만든 너만의 자리.

그곳에서 네가 거둬들인 결실들.

그리고 네가 먹여 살리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이 모든 것을 내놓고 앞으로의 인생에 베팅하는 시기가 마흔이다.

자본가의 마흔은 늘 이렇다. 항상 도전이 함께 한다.

도전이 두렵거든 자본가의 삶을 포기하고 그저 노동자로 살면 된다.

이렇게 쉬운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노년에 배달되는 무거운 청구서를 보고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나이 마흔은 무거운 숫자다.

불현듯 네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땐 알 수 없다.

그때는 아마 네 아비도 네 어미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고,

그 누구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네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저승사자는 불현듯 찾아와 영혼의 사망을 확인한다.

어느 날 퇴근길 혼잡한 지하철 속 흔들리는 창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라고 느낄 때.

영혼의 사망선고는 심근경색과 같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다.

자본주의의 숙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것.

마흔이 될 때까지 자본에 도전하지 않은 자들의 운명은,

씁쓸하지만 대부분 이렇게 정해져 있다.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로맨틱하지도 참신하지도 않다.

가난이란 그저 '곧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상태' 일 뿐이다.

가난은 철저히 상대적이고, 감정적이며 폭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단어다.

가난해도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돈 때문에 사랑과 감사를 표현할 수 없고,

돈 때문에 내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돈 때문에 가족의 꿈을 애써 외면하고,

돈 때문에 늙은 부모의 병환 소식에 눈 감고,

돈 때문에 끝내 자신의 질병도 모른척하게 만드는 것이 가난이다.

정말 가난해도 행복할까.

그런 자가 주변에 있다면, 그저 경계하라.

그가 가장 먼저 너를 변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품과 고급 액세서리는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진다.

액세서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네 마음이 가난한 것이다.

네가 아무리 비싼 장신구를 몸에 걸친다 한들,

너의 걸음걸이가 가난하다면

너는 가난한 것이다.

네가 아무리 고급 중형차를 탄다 한들,

너의 눈빛이 가난하다면

너는 가난한 것이다.

네가 아무리 빛나는 시계를 찬다 한들,

너의 언어가 가난하다면

너는 그저 가난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만원 벌 방법을 알려주면 그의 좋은 친구가 된다.

어떤 사람에게 일억 벌 방법을 알려주면 그는 질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그에게 십억 벌 방법을 알려주면, 그는 비로소 너의 노예가 되길 원할 것이다.

돈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그릇이 있다.

그것을 모르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요,

그 그릇에 무엇을 얼마나 담을지 모르는 자가 나머지 열에 아홉이다.

자본주의에서 부를 다룬다는 것은 자신의 그릇에 뜨거운 차를 담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모르고 복권에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사람들은

종지 그릇을 들고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차를 담으려는 사람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욕망의 마약에 취한 사람들.

그릇이 종지라면 아무리 마신들 쉬이 갈증이 해소되겠는가.

마케팅은 자본주의의 극치다.

마케팅을 통해 노동자는 소비자로 탈바꿈된다.

마케팅을 통해 불필요한 물건은 필요한 물건이 되고,

그렇게 산 물건은 다시 불필요한 물건이 된다.

불필요한 물건은 버려지고, 버려진 물건은 다시 필요한 물건으로 포장된다.

자본주의에는 개인의 욕망을 매우 정교하게 자극하는 소비심리학 기법이 녹아 있다.

자본주의는 없던 욕망도 만들어낸다.

만들어낸 욕망을 대중들은 여과 없이 소비한다.

그것이 사업가가 노동자를 길들이는 방식이고, 이것이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원리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욕망의 바다에 빠져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본주의는 하나의 연극이다.

자본가와 은행가, 그리고 노동자가 그리는 한편의 연극.

주인공만이 희극으로 느끼는 비극적인 연극.

우리는 노동자를 길들이는 자본가가 되던지,

더 나아가 노동자에게 돈을 빌려 자본가에게 빌려주는 은행가가 될 방법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노동은 숭고하다.

그러나 그것에 인생을 걸면 곤란해진다.

노동의 숭고함은 노동을 상실한 노년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노동은 너에게 연명할 시간을 준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을 주진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을 이해하면 자본가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너를 먹여 살린다.

그러나 배불리 먹이진 않는다.

배가 부른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것을 얼마나 빨리 깨닫는지가 네 인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FatalFury